심리상담/심리적 증상

[조현] 이건희 “부모를 정신장애인으로 둔 자녀에게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고진달래 2022. 12. 12. 22:17

정신장애나 성격장애 부모를 둔 자녀들의 어려움과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자녀들의 혼란, 죄책감은 뿌리 깊어서 오랜 상담을 하면서의 목표는

내가 부모의 감정과 어려움을 책임질수 없다는 적절한 선을  만드는 거였다. 

정신장애나 성격장애 부모를 둔 자녀들의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30대부터 조현병 엄마의 보호자역할을 해왔던 강화구씨의 친절한 안내별 블로그도 반갑다. 

 

 

이건희 “부모를 정신장애인으로 둔 자녀에게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5살 때, 그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떠난 것은 폐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겨울 무렵, 정신병원에 입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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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 그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떠난 것은 폐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겨울 무렵,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년 후 퇴원했지만 그가 중학생일 때 다시 입원해 15년 넘게 한 병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돌아온다. 그는 어느 날, 약속 없는 약속처럼 아버지가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믿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생을 추동하는 소망이자 힘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경기 지역에서 아버지와 생활하던 그는 아버지가 입원한 후 큰아버지가 계신 지방으로 전학했다. 친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그 있음에 대한 갈망. 그래서 그는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받으면 찢어버리거나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다. 어디까지 그 비행기는 날아간 것일까.

부모라는 것. 친척이 대신해 주지 못하는 지극한 사랑. 그 부모는 그에게 살아가는 내내 빈 자리의 바람소리였다.

그가 대학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고 부조리한 정신의 고통을 알고 싶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실존과 무관한 탈원화와 정신건강복지법 등을 공부할 때 그에게 그 정책과 법은 아버지와 연계된 실제적 의미들이었다.

예를 들면 탈원화를 주장하지만 지역사회 인프라가 없는 곳에 아버지를 나오게 할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이고 생에 밀착된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아버지와 절연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청약통장 7~8개를 만들었다. 하나가 깨어지면 다른 통장은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통장의 소망 속에는 언젠가 아버지가 퇴원하면 함께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마련하겠다는 유년시절부터의 희망이 고여 있었다.

인터뷰 중간에 그에게 ‘당신이 원하는 삶’과 ‘당신이 당신을 용서했는가’를 물었다. 그는 오래 침묵했다. 그래서일까. “한 번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질문해 보지 못했다”는 그 답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이건희(30) 씨를 만난 건 지난 5일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다. 그는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임상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전공을 마친 후 필드(현장)로 나갈 생각인 그에게 가족으로서, 개인으로서의 삶을 물었다. 어떤 질문에서 그는 깊이 침묵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렸을 때 알코올중독과 조현병에 걸린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의 고통이 어떻게 한 사람을 무너뜨리고 고립시키는지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아버지가 대학을 나와 국가공무원 자격증도 취득하고 주변 관계도 좋고 유능한 분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알코올중독이랑 조현병으로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점 집안에 갇히게 되는 걸 봤어요.

병원에 입원한 뒤로는 퇴원해도 아는 사람이 다 없어져버려요. 정신적 어려움이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는 걸 어릴 때부터 지켜봐왔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첫날, 선생은 슬픔만큼이나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어요. 이해가 됩니다. 좀 더 설명해주실까요.

“어머니가 안 계시고 남자 혼자서, 정신적 어려움까지 갖고 있으면서도 저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들도 많이 했어요. 예를 들면 술을 드시면 폭력이 있기도 했고.”

-아버지 병원 가시고 집에서 혼자 산 거예요.

“아버지 입원하시고 제가 큰아버지가 계신 경기도 이천 시골로 전학을 왔어요. 그때 안도감을 느꼈어요. 아버지는 저를 본인의 방식으로 키우려고 했거든요. 그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들이 많았어요.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오랫동안 놀거나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것도 안 됐고요. 또 백악관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될 거라는 망상도 있었고요. 저는 그걸 듣고 수긍을 해야 되니까 계속 불안했어요.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저는 ‘그래, 일어날 게 일어났구나’하는 안도감과 자유를 느꼈어요.”

 



-살아오면서 평범한 가정에 대한 소망이 많았을 거 같아요.

“어릴 때는 많이 그랬어요.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거나 아니면 학원 차를 타고 학원으로 가거나 이랬는데 저는 경제적으로 학원은 생각하기도 어려웠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들어가고 큰아버지가 저를 많이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했지만 부모의 자리라는 게 있잖아요. 친척이 아무리 열심히 해 줘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자리요.

학부모 총회나 참관수업이 있으면 다른 애들은 부모님이 오는데 저는 항상 혼자서 그걸 치렀어요. 가정통신문 받으면 부모님한테 보여드리고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저는 쓸모가 없는 종이니까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어요. 아니면 종이비행기 만들어 날리고. 통신문 받거나 급식비 영수증 받고서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 드러날까 주변 눈치가 많이 보였죠.”

-아버지 입원비는 누가 내고 있어요.

“다행히 아버지 계신 병원이 시립이어서 따로 입원비가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최근 정책에 좀 바뀌어서 한 달에 7~8만 원 정도 부담이 되는데 그 정도는 제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다행한 일이죠.”

-기자가 아는 지인은 자신이 어릴 때 아버지가 조현병으로 입원했는데 성인이 된 후부터 한 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고 그래요. 선생은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를 병문안 가는 걸까요.

“한 달에 한 번은 가요. 아버지가 기능이 많이 회복돼서 외출이나 자의 입·퇴원이 가능하거든요 카페에서 같이 커피도 마시고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부모님이 조현병을 갖고 있거나 몸이 아프면 자식이 더 이상 찾아뵙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옵션(Option·선택지)도 있다는 걸 생각을 안 해 보고 살았거든요.
당연히 아버지이고 어릴 때 저를 케어해줬으니까 퇴원하면 제가 모시고 살거나 집을 얻어드리거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10~20대를 보내왔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통장을 7~8개씩 갖고 있었어요. 학교에서 장학금이나 생활비를 받으면 다 저축했어요. 저는 조금만 쓰고요. 왜냐하면 저축해야 나중에 아버지 생활비도 드리고 집세도 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두 명 몫을 계속 벌려고 했던 거 같아요. 2인분의 돈이 항상 필요했어요.”

-통장을 7개나 만들 필요가 있나요. 통장 하나에 다 하면 되는데?

“적금통장이죠. 하나를 깨더라도 다른 하나가 보존되도록. 혹시 제가 돈이 급해서 적금을 깨더라도 다른 것들은 깨지면 안 되니까.”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청약이든 일반 예금이든 돈을 많이 모으려고 했어요.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걸 전제로 두고 살았어요. 그러느라 저도 제가 뭘 좋아하고 원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아버지의 삶을 용서했다는 의미일까요.

“아마 저랑 비슷한 입장에 있는 자녀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내가 의지해온 어른이 낮에는 너무 좋은 사람인데 밤에는 술이나 증세 때문에 너무 나쁜 사람일 수 있잖아요. 그게 잘 통합이 안 되더라고요.

아버지의 좋고 따뜻한 모습도 진짜고 어둡고 안 좋은 모습도 진짜니까요.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건데 그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저는 아버지가 해준 것들에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인 건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를 용서했느냐, 잘 극복했냐 물으면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본인이 가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을 길러내려고 분투했던 모습을 봐왔어요. 제가 아버지랑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했을 때 잘 모르겠거든요.”

-아버지와 둘이 살다가 아버지 입원 후에 친척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만약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 거 같아요.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많아요. 제가 다닌 학교는 주변에 논밭밖에 없고 학원도 몇 개 안 되는 진짜 시골이었거든요. 거기 친구들 중에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신 경우는 절반도 안 됐어요.

그 친구들을 보면 오히려 제가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돌봐준 친척도 있었고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서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요. 이런 게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고 그 환경에 놓인 대부분의 친구들은 공부를 계속 하지 못했죠. 만약 그랬다면 저도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바로 일을 하고 그냥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선생이 어려운 가정에 태어났고 어린 시절 폭력과 학대를 당한 건 선생의 잘못이 아니죠. 그러므로 선생은 자신의 삶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감히 그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제가 하는 임상과 상담 공부는 본인을 잘 돌보고 잘 용서하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저는 자라오면서 저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항상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돈을 모았고 미래를 계획할 때도 아버지를 그 청사진 안에 항상 포함시켰거든요.

그래서 내가 괜찮게 살고 있다, 내가 나한테 좋은 것을 해 준다는 그런 마음을 발달시킬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직 (용서가) 현재진행형인 거 같아요.”

-정신장애라는 질병은 ‘특성’이 아니라 ‘본성’이라고 사람들이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좀 더 설명해 준다면요.

“우리가 혈액형을 우리의 인성이라고 믿지 않잖아요. 그건 하나의 특성이죠. 제 신발 사이즈가 260㎜라고 해서 그게 제 본질이나 본성은 아니죠. 그런데 정신장애는 그 사람의 본질이나 본성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아요. 정신장애 진단명을 빼고도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요. 질병은 본성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부르짖고 군사정권 시절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고 대기업이 자신을 미행한다는 개별적 망상은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망상이나 환청 증상은 시대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아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강한 시절에는 본인을 재림예수나 메시아라고 믿는 망상이나 환청이 많았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가기관이 나를 도청하고 감시한다는 내용이죠.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증상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은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안 좋은 점들, 강압적인 점들을 반영하는 하나의 반영물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신장애 너머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정신장애를 가진다는 건 인생이 멈추는 거 같아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차가 잠깐 멈추는 거죠. 다른 사람들의 기차는 무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런저런 풍경을 겪고 기회들을 얻죠.

그런데 정신장애는 그런 기회들을 놓치게 하는 거 같아요.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든지 사람들이랑 만나서 같이 논다든지 이런 일상적 기회들을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서요.”

-이게 종교적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웃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는 따로 종교가 있지 않지만 내가 부여받은 진단명보다 더 큰 개념의 나라는 건 존재하는 거 같아요. 진단명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좀 더, 우리가 우리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범위의 고차원의 나라는 게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울을 가라앉히는 건 약의 힘이지만 그 약을 먹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선생은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일상, 즉 루틴(routine)에 있다고 했어요. 좀 더 설명해주시면요.

“우울이나 조울일 때 기복을 평평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약이 제공하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굳어진 생각까지 약이 바꿔주는 건 아니죠. 증상을 당장 가라앉혀주는 건 약물이 주는 좋은 점이지만 그런 좋은 약물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죠.

결국은 내가 왜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약이 나한테 어떤 면에서 도움을 주는지, 약 말고 내가 스스로 무엇을 찾아나서야 하는지 내면에서 정리가 돼야 약도 꾸준히 복용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작정 약은 좋은 거니까 복용해라고 강제할 수 없죠. 우리는 항상 약이 이래서 좋습니다라고만 말하지 그 약을 먹어야 되는 동기나 이유에 대해서는 얘기를 덜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약을 먹게 하는 힘은 이 사람이 자기 일상에서 어떤 걸 중요하고 의미있게 생각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 도움을 주는 건 의외로 간단해요.

신체적으로 몸을 움직인다든지,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든지 이 사람이 증상 때문에 마주하지 못했던 일상의 여러 기회들을 다시 제공받을 때 약물치료도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고 시너지를 내는 거라 생각해요.”

-우울증 치료에 실패하기 위해서는 끼니를 거르고 즉석식품을 사 먹고 새벽에 깨어있고 몸을 움직이지 말고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믿으라고 했어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저도 그랬어요.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약을 타는 것부터 시작하잖아요. 약이 내 증상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 시작을 하는 거죠. 그런데 약을 챙겨먹기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바꾸지 못하잖아요. 약을 잘 챙겨먹더라도 정작 끼니를 거르거나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거나 잠을 제때 자지 않는 상태를 바꾸지 않은 채 약만 먹는 것으로 본인이 가진 어려움을 해결하기가 어렵죠.”

-잠, 숙면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어떤가요.

“잠이 불규칙해지고 자는 시간이 줄어들면 정신건강에 큰 타격을 주는 거 같더라고요. 제가 실제 체험했고 또 주변 사람들을 많이 지켜봤을 때 그게 악순환인 거 같아요. 정신적으로 어려워지면 잠을 규칙적으로 충분히 자지 못하고 잠의 사이클이 무너지면 더 정신적으로 취약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는 거 같아요. 잠 이외에도 먹는 음식도 그렇고 외출해서 햇볕을 쬐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걷거나….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생각하는 여러 루틴들을 적절하게 챙길 때 약물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정신건강 회복에 굉장히 많은 도움을 준다라는 걸 저 스스로도 많이 체험했어요.

그래서 정신건강 서비스도 단순히 약물치료나 상담만 강조할 수는 없죠. 약물치료나 상담은 매달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잠깐이잖아요. 그 잠깐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동안 당사자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는 저희가 안 하는 거 같아요. 그런 루틴들을 잘 챙기는 게 회복에 도움을 준다고 피부로 많이 느꼈어요.”


-대학원에서 임상상담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심리학이 정신장애인 가족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건 심리학만의 한계는 아니에요. 다른 분야의 학문도 정신장애인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가족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거 같아요. 가족에 대한 개입도 개발돼 있는 거 같지도 않고요.

정신의학이나 사회복지학 분야에서는 오히려 가족교육이나 가족의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연구나 개입들이 좀 있어요. 반면 심리학의 경우 정신장애인이라는 임상군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왔지만 그 임상군의 주변 사람들, 가족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예요. 가족에 대해서 개입하려는 심리학 전문가들이 아직까지는 많이 보이지 않는 거 같아요. 이쪽에 관심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예리하게 보셨네요.

“제가 가족 입장이다보니까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가족이 심리학자를 찾지 않는 건 당사자의 약 복용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 외의 심리적 부분까지 챙길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가족모임에 가보면 어떤 약이 용하고 어떤 약이 우리 자녀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의사 선생님이 우리 자녀를 잘 돌봐줄까를 가장 많이 얘기해요. 용한 병원이나 용한 의사를 찾아다니는데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자녀나 당사자의 회복에만 집중하다보니까 정작 가족 자신이 겪어왔던 심리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신장애인 가족을 둔 경험을 똑같이 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이 경험을 이해를 못하잖아요. 밖에서 자기 경험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자녀는 돌봐야 되는 상황에서 정작 본인을 돌보고 본인의 얘기를 풀어낼 기회가 너무나 적었던 거죠. 내 자녀가 빨리 낫는 거, 내 자녀가 행복한 거에 평생을 바쳐 살아왔는데 내 심리적인 케어를 해 줄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가는 건 굉장히 낯선 개념이죠. 내가 누릴 수 있는 심리적 서비스, 내가 찾아갈 수 있는 심리적 전문가에 대해서는 조금 논의가 덜 되고 있어요.”

-정신장애인을 책임져야 하는 가족의 옆자리에 심리학과 상담학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가족들이 주로 찾는 기관이 어떤 기관인지를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아요. 주로 이분들이 가는 기관은 병원 아니면 사회복지기관이잖아요.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찾아가는 전문가는 정신과 의사 아니면 정신건강사회복지사죠.

그런데 저는 정신장애인 가족들이 심리학자나 심리상담사를 찾아간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실제 가족모임에 갔을 때도 어느 심리상담센터가 더 좋은지에 대해 얘기하는 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정신장애인 가족들에게 약과 사회복지 기관이 해 줄 수 없는 심리적 서비스는 심리학에 기반을 둔 서비스가 더 잘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서비스나 자원이 이분들 곁에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거죠.”

-심리학과 상담학을 많이 이용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죠. 정확히는 가족들에게 이런 게 있으니까 많이 이용해 주세요가 아니라 이 전공을 한 우리가 가족들 옆으로 많이 가야 한다는 의미예요. 최근에는 제가 아는 모 임상심리상담센터 에서는 정신장애인 가족도 센터의 클라이언트로 포함시키면서 가족을 더 잘 이해하려는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상담에서 가족의 경험을 어떻게 잘 이해하고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가 많이 나왔으면 해요.”

-임상심리센터는 정신건강복지센터랑 틀린 곳인가요.

“제가 말씀드린 건 민간센터.”

-이용하려면 돈을 내야 하잖아요.

“그렇죠.”

-학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있어요.

“저는 지금 교내, 교외 장학금을 통해서 학비를 마련하고 있어요. 등록금은 지금까지 장학금으로 많이 충당이 돼 왔어요. 생활비는 학교 안에서 근로를 해서 근로 대가로 장학금을 받는 것들이 있어요. 근로장학생으로.”

-어떤 근로를 해요?

“학생상담센터에서 일하면서 접수실에서 내원하는 학생들을 응대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전공이랑 비슷한 걸로 일을 하시네요.

“네 (웃음).”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이 세계의 시선은 혐오와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코드만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가족 입장이 아니라 정신질환 관련 일을 하려는 예비 종사자 입장에서 고민해 봤는데요.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도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정신장애를 치료하고 통제하려는 많은 움직임이 정말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그 복지를 증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던 걸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이 공부를 하면서요.

내가 배우고 있는 이 공부와 내가 하려는 일이 정신장애를 두려워하는 사회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고 사회 치안을 더 강화하고 정신장애인을 보다 인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기여하는 일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자기 회의를 가지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혐오와 두려움은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두려워하는 걸 혐오하고 혐오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걸 통제하고 싶어하고 그걸 통제하려고 격리시키고 치료하려는 거…. 이런 의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을 많이 해요.

저는 혐오랑 두려움에 반대되는 개념은 이해라고 생각을 해요. 이 사람의 내면적으로 어떤 세계를 만나고 있고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진짜 말 그대로 이해하려는 호기심이 혐오와 두려움의 반대되는 감정이죠. 저는 그런 이해를 하려는 전문가로 성장을 하고 싶어요.”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위험하지 않다는 통계 수치까지 내보여도 세상은 정신장애인을 두려워합니다. 이 원인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돌출돼 있잖아요. 뭔가 특이한 거 같고 신기한 거 같고요. 바깥에서 봤을 때는 굉장히 눈에 잘 띄죠. 범죄 수치가 낮지만 똑같이 보도가 됐을 때도 더 도드라져 보이게 되고 도드라져 보이니까 확증편향처럼 되잖아요.

예를 들면 경찰이나 형사의 숫자는 적은데 범죄드라마에는 형사나 경찰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실제 수치보다 형사나 경찰의 숫자가 굉장히 많다고 인식을 하잖아요.”

-장애인복지법 제15조 폐지된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신장애인의 경우 정신건강복지법의 서비스만 받고 장애인복지법 서비스 이용을 가로막고 있던 조항. 올해 12월 정부는 이 법 제15조를 폐지했다-편집주)

정신장애인의 위치가 참 애매한 거 같아요.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에 관련된 법이고 정신건강복지법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법이잖아요. 정신건강복지법은 의료적 법이고 장애인복지법은 복지적 법이죠. 그럼 정신장애인은 정신질환자인가, 아니면 장애인인가 했을 때 애매한 경계에 있기 때문에 장애인복지법 제15조가 있었던 거 같아요.

이 사람은 정신질환자로서 정신건강복지법에 포함되니까 장애인복지법 혜택을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니냐가 15조의 핵심이었잖아요. 그 애매한 위치를 어떻게 법적으로 규정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던 거죠. 법적으로 정신질환에 묶이지 않고 장애인복지법에도 묶이지도 않는 사각지대가 존재해왔던 거죠.

그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은 이 두 법 모두로부터 외면을 당해왔던 거 같아서 정신적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 법이 나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대체하거나 기존의 정신건강복지법의 외연을 확장하는 그런 움직임이 필요하죠.”

-탈원화가 화두(話頭)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인데요. 제가 사회복지 학부 공부를 할 때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해서 발표를 하거나 토의를 하면 탈원화에 동의하는 학생들이 참 많았어요. 저도 동의하는 목소리를 냈었고요. 그런데 탈시설을 해야 한다고 입으로는 주장하는데 마음속에는 캥기는 게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당장 그 시설에 들어가 계시는 분이니까요. 지금도 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어요. 기본적으로는 시설이랑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회적 기회들을 누리면서 같이 어우려져서 살아야된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가족 입장에서 보면 그럼 이들이 밖으로 나와서 그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냐인 거죠.

전공자 입장에서는 동의하는데 가족 입장에서는 나와서 어디 가지? 어디 취직하지? 어디서 살 수 있지? 이런 것들이 해결이 안 돼 있는 거예요. 지역사회 인프라가 구축되고 탈시설화가 같이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뭔가 이도저도 잘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선생의 아버지는 15년 이상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아버지의 향후 삶이 어땠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향후 삶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게 최우선이겠지만 제가 바라는 건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왜죠?

“친구를 사귄다는 건 아버지가 병원에 있으면서 놓쳤던 많은 기회들이 함축돼 있는 거거든요. 사람을 만나서 친밀한 관계를 쌓고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러잖아요. 그런 많은 것들을 하실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친구를 만나고 네트워크에 소속이 돼서.”

-아버지가 예전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는 건가요?

“예전 친구들 말고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퇴원하면 집을 구해야 되지 않나요.

“그렇죠. 그런데 저도 제 한몸 건사하는 게 불투명하다보니까 아버지한테 확실히 약속을 못 하고 있어요. 제가 대학원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면 그때까지는 나오셔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포기하고 집 구하기도 어렵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잖아요. 저도 똑같은 입장인데 제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아버지 몫으로 뭔가를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앞날이 솔직히 좀 깜깜해요(웃음). 그런데 일단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가족이면서 동시에 당사자입니다. 이 이중의 굴레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요.

“그냥 사는 것 자체가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은 거 같아요. 가족을 앞으로 돌볼 것도 생각을 해야 되고 제가 저 스스로도 돌봐야 하고요. 한 번에 두 명을 돌봐야 된다는 삶을 생각하며 살아오다보니까 지쳐버린 거 같아요. 지금은 많이 지쳤어요. 삶을 봤을 때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지기보다는 가끔은 아, 그냥 빨리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인생이 끝나버렸으면 좋겠고 직장 그만두듯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젊다고 하지만 이걸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나이 많으신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결국에는 해뜰 날이 온다는데 정말 올까(웃음). 저뿐만 아니라 저와 비슷한 입장에 계신 많은 분들이 이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부모를 정신장애인으로 둔 사람, 혹은 자식을 정신장애인으로 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나요.

“제가 부모를 정신장애인으로 둔 자녀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건 저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설령 부모를 돌봐야하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부모 인생은 부모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나름의 선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래서 자기 인생을 한 번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끝내고 카페를 나오며 기자는 겨울 나목(裸木)을 생각했다. 눈 지긋이 감고 내리는 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나무. 언젠가는 그 줄기에 이파리가 파랗게 돋아나고 세상 끝까지 풍요로운 녹색으로 가득할 그 나무를. 

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