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8
지난주 금요일에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사무실 근처로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그는 네팔로 갔다.
작년 모 대학 의과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네팔인의 상담 의뢰를 받고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심하게 위축된 상황이였다.
목소리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한 듯 했지만
그는 물어보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아주 솔직하게 최대한 자신을 오픈하였다.
네팔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소통을 하는 것이 충분치 않은 조건임에도
그는 도움이 절박해보였다.
종이에 적어가며, 천천히 언어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말에 집중하면서 들었고, 말했다.
그는 불안이 높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잠을 못자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했다.
네팔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고,
한국 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증상이라고 했다.
우울감과 불쑥 튀어나오는 분노를 호소하여서,
일단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기를 권유했다.
동시에 난 스트레스를 낮추는데 조력하는 계획을 세웠다.
사회적 지지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서
네팔어를 할줄 아는 명주, 미혜샘과 만남을 주선하면서
그는 긴장이 낮아졌고 한국사회 적응하는데
한결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올 해 박사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결심도 했더랬다.
네팔에서 살면서 난,
느긋한 네팔인들이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오면
생활리듬에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각박한 인심, 빠르게 돌아가는 리듬, 빡센 일정,
물어봐도 대답없는 사람들, 이어폰을 꽂고
타인에게 관심없는 표정, 경쟁으로 무장한 집단문화..
어느곳 하나 느림으로 비집을 틈이 없는 한국에서,
무질서 속에서 자유롭고 느긋한 네팔리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기 쉬울것 같았다.
더군다나 위계가 분명한 의대 대학원 문화는
이가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권위적이고 몰아붙이는 교수,
실질적인 언어가 통하지 않은 랩실,
8시 출근 8시 넘어 퇴근,
결과물이 빨리 나와야하는 분위기..
어디서든 숨을 트일 구멍이 없었다.
석사때도 그이는 교수가 식사때 앉는 자리에는
앉으면 안되고 무조건 따라야하는 문화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3년 있어도 이렇게 힘들데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한국에서 살아가느냐?’ 라고 묻는다.
‘그르게 그래서 다들 속으로 병들지 않았을까
우리는 적응해야하는 상황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나도 씁쓸해다.
결국 그는 심한 우울감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박사 마무리를 못한채, 네팔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박사 학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1년 잘 마무리 하는 것이 어떤지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그는 마음에 상처가 깊은 듯 했고 지친듯 했다.
작년에 만났을 때 그는 학위를 마무리 하지 못한다면
네팔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자신의 열등감으로 힘들다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에 더 있다가는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듯 했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신 건강과 행복을 강조하며
상담을 받고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들
뭐가 달라지는가.
에리히 프롬이 말한 대로
사회 자체가 [건전한 사회]가 아닌거라면...
사회 자체를 건전한 사회로 만들지 않는 한 이것은 깨진 독에 물 붓기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 > 일상,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함으로 세계를 재해석하기 (0) | 2022.12.12 |
---|---|
성매매 과정에서 성폭력은 가능하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는 현실 (0) | 2022.12.04 |
[일다] ‘청량리588’ 재개발…여성들은 어디로든 떠나야한다 (0) | 2022.12.04 |
내담자의 절망을 견딜 수 있는 분석가의 능력 (0) | 2021.08.16 |
'보아넘길수 있는 실패' (0) | 2020.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