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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청소년 자해 3부작]고교생 연우, ‘자해알못’ 어른들에게 고함

고진달래 2022. 12. 1. 10:44

청소년 자해 3부작

고교생 연우, ‘자해알못’ 어른들에게 고함

“애기 때”부터 자해… 경험·공부·상담 통해 성장
정신과 전문의들도 경청하는 청소년 자해 전문가로

자해를 경험한 고2 연우(가명)가 만든 유튜브 동영상 <고2_나의 자해 이야기와 plz don’t do/do(제발 하지 마세요/해주세요)> 화면 갈무리.

 

“이 영상은 상투적이며 무책임한 ‘우린 할 수 있어’ ‘우린 최고야’ ‘힘내’ 응원의 메시지는 없으며, 자해 트리거(방아쇠)가 일부 존재합니다. 전문적인 도움이나 마법 같은 변화를 드릴 수 없음을 미리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연우(가명)가 만든 유튜브 동영상 <고2_나의 자해 이야기와 plz don’t do/do(제발 하지 마세요/해주세요)>의 서두에 깔린 내레이션이다. 공감과 격려만으로 자해 청소년의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서글플 정도로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상이 스트리밍(재생)되는 20분 내내 검은 바탕 위에 흰 글씨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자해 핵심정리’ 문장들이 이어진다. 연우가 오랜 시간 경험하고 공부한 내용이 집약돼 있다. 고교생의 흔한 자해 경험담이라고 치부하기엔, 상담전문가 수준의 통찰이 담겼다.

 

연우는 최근 부쩍 청소년 자해 문제에 관심이 높아진 정신과 전문의, 상담교사, 교육부 담당자들이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인기 강사다. 발표와 강연도 여러 차례 했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요즘 연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해 청소년 대변인’ 격이다. <한겨레21>은 10월20일 어렵게 연우를 인터뷰했다. 여기에 연우가 만든 유튜브 영상, 9월20일 ‘자해 대유행, 대한민국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연 심포지엄에서 연우가 발표한 내용을 덧붙여 연우의 동의 아래 1인칭으로 재구성했다.

 

#1 착한 아이, 연우 이야기

 

저는 철든 아이의 표본이었어요. 아토피를 앓으면서도 숨어서 긁을 정도였죠. 엄마가 걱정할까봐.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어린 자식이 일찍 철든 것을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자녀를 모른다는 얘기예요. 애는 철이 날 수 없으니 애예요. 겉으로 철들어 보인다면 그저 곪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 아빠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부모님 기대를 꺾으면 어떻게 하지?’ 두려운 거죠. 부모가 알던 나와 지금 나의 괴리가 있는데, 아이들이 그걸 부모님한테 어떻게 말해요. 어려서부터 그저 “괜찮다”던 자식이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하면, 둑이 터지듯 한번에 다 무너져요. 저처럼.


어느 집이나 사정이 있을 텐데, 저희 집은 아빠가 엄마한테 나빴고 엄마는 아빠한테 나빴어요. 저한테 나쁜 말을 하신 분들도 부모님이지만, 부모님도 상처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너무 아팠어요. 자해하는 많은 친구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해요. 차라리 부모님이 100% 나쁜 분이기만 하면 미워할 수라도 있죠.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결국 제가 위로받아야 할 사람도 같은 분들이고. 그럼 아이들은 ‘아, 내가 잘못했구나’ 결론을 내요. 자해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자기혐오죠.

 

부모님은 지난해에야 아셨지만, 저는 ‘애기 때’ 처음 자해를 시작했어요.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우울감에 시달렸어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답답함을 느꼈죠. 과호흡을 진정시키려고 목을 졸랐어요. 산소가 부족해지고 머리가 띵해지면 조금 편안함을 느꼈어요. 좋지 않은 방법인 건 알았지만 자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해를 시작한 거예요.

 

커터칼로 손목 긋기, 이른바 ‘리스트 컷’을 시작한 건 재작년쯤이에요. 공황장애와 함께 전신마취에 절어 사는 기분이었어요. 통증이라도 있어야 ‘내가 살아 있구나’ 느껴졌어요. 그렇게 현실감각을 찾으려고 시작한 일이에요. 많이 할 때는 일주일에 네댓 번, 한번 시작하면 여러 번, 그었죠. 문제집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피를 흘렸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출혈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면 ‘지금 이게 현실이구나, 살아 있구나’ 느꼈어요. 요절을 동경했지만, 저는 죽기로(자해로) 살기를(살려고) 발악한 거라고 생각해요.

 

#2 어른들은 모른다

 

 

리스트 컷은 오래가지 않아 어른들에게 ‘발견’됐어요. 첫 발견자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로 압축시켰죠. 친구 문제. 어른들에겐 이 모든 일이 간단하게 보였나봐요. 자살과 자해의 원인을 학업 스트레스로 꼽는 어른들도 있어요. 맞는데, 공부가 고통스러워서 죽는 게 아니에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아이들을 자살과 자해로 이끌어요. 현행 ‘국영수사과’(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커리큘럼은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교수 만드는 교육 같잖아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면 아이들의 감정은 깊고 우울한데 그걸 표현하는 언어는 너무 제한적이에요. 국영수사과 대신 문학, 예체능, 건강한 관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많이 가르치면 자해하는 아이가 확 줄 것 같아요.

 

어른들은 요즘 자해하는 래퍼의 등장으로 청소년 자해가 당당해지고, SNS를 통해 자해가 놀이에서 고질병으로 번진다고 우려해요. 제 생각은 달라요. SNS에 노출된 청소년 자해는 극히 일부예요. 청소년 정신건강의 근본 원인을 SNS에서 찾으려는 것도 잘못된 접근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이 음지에서 자해를 공유한다는 어른들의 지적은 화나죠. 밖으로는 정신건강에 대해 얘기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그래서 안 보이는 곳으로 파고들면 비행이고 탈선이라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어른들이 청소년 자해 문제를 덮어두고 쉬쉬하다가 이제 발견한 것뿐이에요. 분명, 자해하는 래퍼의 등장보다 자해하는 청소년이 먼저 존재했어요. 지금껏 없던 자해 청소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에요. 이제야 사회가 그들을 보기 시작한 거죠. 선생님이 한 반에 한두 명 정도 자해를 하는 것 같다고 걱정스레 말하는 걸 들었어요. 선생님한테 발견된 한두 명만 자해를 하는 건 아니에요. 보이는 것만 있을 거라고 믿는 건 편협한 생각이죠. 빙산의 일각이니까.

 

#3 자해 청소년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

 

 

자해하는 아이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어요. “왜 그랬어!” “너 왜 그런 거야, 말 좀 해봐!” 그러게 말이에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왜 자해를 했겠어요, 말을 하지. 어른들도 놀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이런 식으로 물으면 더는 할 말이 없어요. 어떤 이유로든, 자해하는 아이를 다그치지 말아야 해요. 두렵고 벗어나고 싶어서 자해를 하는 거예요. 다그침 대신 절대 안정이 필요해요.

 

“괜찮아? 내가 다 들어줄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해하는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것처럼 말하지 말아주세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들어주기의 안정감을 무시해서가 아니에요. 자해하는 사람을 다그쳐서 듣고 싶은 대답을 들으며 ‘나는 저 아이가 의지하는 사람이야’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아달란 얘기예요. 동정하지도 말아주세요. 동정받으려고 자해한 게 아니잖아요.

 

#4 절대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동의 없이 주변에 알리는 것. 너무 답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위클래스(학교 상담실)에서 제 동의 없이 부모님께 제가 자살 고위험군이라고 알렸죠. 난리가 났어요. 힘든 건 저인데, 오히려 가해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많은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해요. 물론 자살 고위험군 아이들을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면 집에 얘기해야 하는 건 맞아요. 다만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서로 다르잖아요. 자해 사실이 알려진 뒤 아이가 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닌지, 그런 특수성을 고려해주세요.

 

누군가의 자해 사실을 알았을 때, 이를 알리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정신적 문제에 사회적 편견이 너무 강한 사회잖아요. 당사자 동의 없이, 도움을 주려는 목적도 없이 주변에 알리는 것은 그저 힘든 사람을 가십으로 도마 위에 올리는 행동일 뿐이에요. 자해 청소년을 보고 얼마나 놀랐든, 그건 상담사와 해결할 문제지 주변에 소문내야 할 문제가 아니에요. 누구에게도 소문낼 권리가 없어요. 저는 자해하는 친구들이 조용히 초콜릿 하나 던져놓고 가고, “자라” 한마디 해주고 가고 그런 게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자해 상처를 검사한다고 불쑥불쑥 개인적 공간에 찾아오시는 것도 폭력이에요. 자해 청소년을 안정시키기는커녕 더 큰 스트레스를 주거든요. 자해 도구를 빼앗기도 하죠. 자살을 막겠다고 마포대교 난간을 높이는 것과 똑같아요. 도구를 빼앗는다고 멎어질 자해였다면 애초에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어요. 살갗의 멀쩡함이 아이의 말짱함을 의미하지 않아요. 도구를 빼앗고 숨기면 어른들은 안심이 될 거예요. 하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해서 자해를 선택한 아이들은 더 강한 반항심을 갖게 되고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어요. 도구를 주고 자해를 장려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이가 안정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자는 말이죠.

 

시도 때도 없이 자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제발…. 자해한 것은 맞지만, 자해하는 것을 들키거나 보여준 것도 맞지만, 여전히 예전에 알던 그 가족·친구·지인일 뿐이에요. 만날 때마다 자해 문제로 눈치를 주거나 자해 쪽으로 화제를 몰고 가면 너무 힘들어요. 자해를 하고 있지만, 외계인은 아니잖아요.

 

#5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제가 경험한 것, 주변에서 경험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것만 정리할게요. 먼저, 자해할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을 못해요. 옆에서 아무리 뭐라 말해도 소용없어요. 정신이 돌아왔을 때, 꼭 약 바르라고 해주세요. 약국 가서 “뛰다가 넘어졌어요” 하고 약 받으면, 그 약이 그 약이에요. 흉 생기는 거 무서우면 습윤밴드 ‘메OO’ 붙이게 해주시고요.

 

자해하는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건, 누군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지지와 안정감이에요. 어쩌면 스스로에게 얻기 힘들었던 지지와 고요한 상태일지도 몰라요. 아이가 자해 얘기를 꺼내놓을 때,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 정도의 담담한 지지를 해주세요. 아이가 원한다면, 안아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자해하는 아이가 상담이나 치료를 받고 싶어 해도 전문기관에 데려가지 않는 부모가 많아요. 아이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와 전문가가 판단하도록 해주세요. 전문가가 아니면서 자해하는 아이를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주세요. 자해 자체는 아직 정신질환이 아니지만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의 가시적인 증상 중 하나예요. 병명과 병증을 밝히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잖아요. 그렇다고 “넌 정신병자니까 병원에 가야 해, 넌 심각한 문제가 있어!” 이렇게 그 사람을 종용하거나 몰아가지는 말아주세요. 정신질환이 아닐 수 있다니까요.

 

아이의 자해를 알았을 때 보통 부모는 기겁을 해요. 하지만 아이들이 자해라도 해서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극단적 선택지가 더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자해가 잘한 일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자해라도 해서 살아남은 걸 인정해주고 치료를 시작하는 게 맞다는 거예요.

 

#6 영화 같은 ‘극복 서사’는 없다

 

 

저는 <월플라워>라는 영화를 좋아해요. 저를 살게 해준 영화예요. 주인공은 절친이 자살했고 부모한테 성적 학대를 당해 정신적으로 되게 힘들어요. 주변 친구들은 성소수자이거나 ‘데이트폭력’ 피해자고요. 보통 청소년 드라마는 말도 안 되는 불행을 던져주고는 150분 만에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데, <월플라워>에선 그런 거창한 미래가 없어요. 댄스파티에서 파트너 없이 벽에 붙어 있다가 ‘불량품들의 세계에 온 거 환영해’ 하고 놀다가 끝나요. 자해도 마찬가지예요. 자해를 단번에 끝내는 극복, 터닝포인트(변곡점)를 얘기하는 건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실례죠.

 

중학교에 자해하는 아이가 많아요. 부모님도 선생님도 중학교 때 발견해서 다행이고, ‘빨리 케어’해서 고등학교 땐 자해를 안 하게 만들려고 하죠. 하지만 몸으로 상처가 드러날 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다는 얘기예요. 기간을 정해두고, 단기간에 낫게 하려는 건 서로에게 벅찬 일이에요. 드라마틱한 극복 서사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주세요.

 

자해라는 부정적 사고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정말 중요해요. 일단 살아야 하니까, 진짜 작은 것부터 아이 스스로 정해서 달라지게 해주세요. 올해 초 엄마가 “나한테 게을러 보였던 네 모습이 너한테는 생존이었던 걸 이제 알겠다”고 해주셨을 때,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제시간에 일어나 밥 먹고 양치하고 세수하고 학교 가는 것 자체가 ‘사투’였어요. 엄마가 그걸 인정해주시면서 저도 차츰 나아졌어요. 저는 한 달간 ‘하루 6~10시간만 자고 일단 학교에 가기’를 했어요. 그다음엔 하루 한 끼라도 먹기, 그다음엔 숙제 3개 중 1.5개 하기. 그렇게 조금씩 저 자신을 찾아나갔어요.

 

우울할 때 잠만 자는 친구들이 있어요. 우울할 때 잠시 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우울할 때마다 자면 장기기억으로 저장돼 습관이 돼요. 우울한 감정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작은 것’이라도 의미를 찾아내는 게 생존이에요. 진짜 별거 아니지만, 저는 스타벅스 케이크랑 할리스 케이크를 맛으로 구분하고, 아침 등굣길에 ‘날이 좋네’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우울이 나의 전부가 아니야’ 저한테 계속 얘기를 해주죠.

 

#7 자해를 드러내고 알게 하고… 버티자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살·자해를 모르고, 알게 되면 따라 할 거라고 여기죠. 사실 아이들은 이미 다 알아요. 아이들이 지금 겪는 고통이 우울증인지 정신분열인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인지 아는 게 힘인데, 어른들은 자꾸 감추려고만 해요. 자꾸 감추지 말고 열어놓고 얘기해야 해요.

 

저는 낫고 싶어서 스스로 공부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책에서 “부모님의 불행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글을 읽고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어요. 제 탓인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참고 문헌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입시 측면에서는 시간을 버린 거지만, 생존 측면에서 보면 저를 살린 공부예요. 죽고 싶고, 학교 가기 싫은데 안 갈 수가 없잖아요.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정신건강 관련 책은 다 읽었어요. 제가 느끼는 증상도 다 적었고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더라고요. 상담을 받기도 하지만, 구글링(구글 검색)으로 호흡법 같은 걸 찾아보면서 자가치료도 해요. 혼자 알기 아까운 것은 인터넷에 올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도 하고요.

 

제가 자해를 하지 않은 지 이제 반년쯤 됐어요. 저는 한때 자해했지만 지금 이렇게 잘 살아 있어요. 지금 자해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진 외톨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비슷한 처지의 제가 여기 살아 있어요. 살아 있으니까 가능성이 있는 거고, 살아 있기 때문에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살아 있는 걸로 버텨요, 우리.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https://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61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