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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왜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는가 :정희진

고진달래 2022. 12. 3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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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왜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는가

  [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4     왜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는가       이 글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다른 여성(주의자)의 생각과 많이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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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4

왜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는가

 

 

이 글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다른 여성(주의자)의 생각과 많이 다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위치 -망한 지구의 요란한 도시, 서울 남서부 변두리 지역에 사는 50대 여성- 의 혼란과 좌절, 검열을 ‘정리하지 않은’ 두서없는 글임을 밝혀둔다.

 

얼마 전 읽은 박권일씨(〈88만원 세대〉 공저자)의 글이 좋았다.  “2030세대 당신들에게 아부하고 희망을 제시하는 어른들을 믿지 말라. 당신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충고하는 꼰대들의 말을 참고하라. 세상은 더 나빠질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만 서른 살에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접했다. 이후에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내게 여성주의는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그냥 주어지는 기본 값이 아니다. 최근 나는 남성사회보다 나 자신, 동료, 젊은 여성들의 검열이 더 두렵다. 내 의견을 공유하고 싶지만 ‘꼰대’, ‘갑질’, ‘훈계’...소리를 들을까봐 참는다. 여성들 간의 차이 중 ‘아가씨’와 ‘아줌마’가 있다. 이는 단순한 연령주의가 아니라 여성의 나이 듦 경험을 부정하고, 여성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담론이다. 어쨌든 나는 박권일씨의 용기가 부러웠다. 즉 나는 이글의 기획에 적합한 필자가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거절했으나 담당 활동가의 진정성 넘치는 제안에, 결국 내 주제 파악을 포기하고 솔직하게‘라도’ 쓰기로 했다.

 

일단 나는 “앞으로 5년을 살아갈 페미니스트를 위한 제언”이라는 청탁 주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토론이나 논쟁은 좋아하지만, “제언”, “대안” 운운하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만이 문제일까?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나아질까? 거대 양당 간의 정권 교체가 일어난다 해도 차이가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진행 중인 지구 멸망이 아닐까. 사회에서 지난 3년간 코로나19 위중증 환자와 사망한 사람의 26%가 장애인이고, 코로나19로 인한 사망보다 자살자가 통계청 통계로 최소 8배다. 여성주의의 ‘주도로’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플랫폼 자본주의가 가져온 기후 위기, 실업의 만성화, 우중화(愚衆化)가 아닐까.

 

 

나를 포함 여성도, 여성주의자도 젠더에 대해 알기 어렵다.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사유다. 도대체 누가 여성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현실이 계급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듯, 젠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은 구조적 피해자”라는 원칙만으로는 싸울 수 없다. 젠더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남녀간 권력 관계로 ‘보이는’ 젠더는, 여성들 간의 차이와 남성들 간의 차이를 매개로 작동한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 자원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장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가장 빼어난 인식론이다. 여성주의는 공부해야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여성(female)이 여성(women)이 되는 과정 그리고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모두 엄청난 정치적 노정(路程)이다.

 

 

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젠더에 관심 있는 사람도, 젠더가 무엇인지 아는 이도 없다고 본다. 여성운동 단체 출신 의원도 마찬가지다. 표 싸움일 뿐이다. 윤석열 정권이 무슨 심각한 가치관이 있어서 “여가부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여성계’를 포함 한국사회는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정책 모든 분야에서 인식론으로서 젠더의 지위가 매우 낮다. 젠더가 문제가 될 때는 정치인의 성범죄로 상대방을 공격할 거리가 생겼을 때 뿐이다. ‘그들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냥 젠더에 무지해도 되는 권력을 가졌을 뿐이다. 이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백래시’라는 분석도 과분하다. 지금 한국의 남성 문화는 극소수 여성 인구가 과잉 재현된 ‘서울 강남에 사는 고학력 전문직 중산층 이성애자 금수저 여성’을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며 분노하고 있다. 한국의 남성 문화는 주체적인 백래시가 아니라 좋게 말해 문화 지체 현상이고, 예전처럼 ‘기 살려주기’를 해 달라고 보채는 현상이다.

 

 

연대와 희망보다 공부를

 

나는 당대 여성주의의 곤란은 “구조적 모순으로서 성차별은 없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집단’의 등장 때문이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 이번 정권이 독특한 재앙이긴 하다- 여성주의의 대중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의 빈곤에 있다고 본다. ‘사회적 모순으로서 성차별 없다’는 인식은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한국사회 특유의 발전주의 때문이다. 발전주의 세계관에서는 그 어느 사회적 약자도, 사회정의도 “나중에”다.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하거나 현실을 가시화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인식된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사회도 지배적 언어(인식)는 단 한 번도 약자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기반이었지만, 현대 페미니즘은 〈제 2의 성〉을 기준으로(1949년 출간) 백년이 안 되었고 한국사회에서는 30~40여 년 되었다. 그 기간도 법 제정과 젠더 주류화라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 철학’ 자유주의의 자장 안에서였다. 이 글의 청탁서 내용 중 “부정적인 상황 자체에 그치는 것 보다는 멀리 보이는 낙관과 희망, 연대를 기대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보려고 합니다”를 읽고,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낙관과 연대는 희망 사항, 당위일 뿐이고 그런 언어는 우리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부정적인 상황”? 부정적 상황이 지금 현실이라고 치자. 현실과 현실을 설명하는 글(재현)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크다. 영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역사에는 그 시간을 메워주겠다며 나서는 ‘예언자/선동가/간증인’이 있다. 사회운동이 종교화되거나 비현실적/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여성들은 나를 포함, 여성주의 커뮤니티(여성단체)에 대한 기대가 높다. 그러나 여성운동단체는 해방클럽도, 교회도, 쉼터, 힐링 센터도 아니다. 상근자들도 봉사자나 성인(聖人)이 아니다. 여성단체 상근자들은 이틀 일하고, 이틀 공부하고, 이틀 쉬어야 한다. 여성운동 단체의 존재 이유는 여성해방이 아니라 오로지 상근자들 자신의 성장과 전문성 획득에 있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를 참조하라). ‘우리는 그들을’ 전문가로 만들 책임이 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군 위안부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 당사자가 30년 운동의 ‘진실’을 말했는데도, 한국사회는 이용수 님의 말을 편의대로 전유했다.

 

공부가 부족하니 매일 발생하는 현안에 대처하지 못한다. ‘이준석’ 같은 이들과 ‘덤 앤 더머’ 논쟁(?)으로 진을 뺀다. 한국사회는 이미 오래 전 공부를 적대시하고 스펙이 공부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약자(여성)로 태어난 것 자체로 약자의 언어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미소지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언어를 부정하고 누군가에게 “한 말씀”을 청하지만, 여성주의를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이 언어를 갖는 것이다.

 

여성에게 유일한 무기는 언어 밖에 없다.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 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포지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나는 최근 한국의 여성주의를 설명하는 ‘페미니즘 리부트(부트된 적이 없다)’, ‘백래시’(그냥 젠더 무지다)’, ‘교차성(교직성, 횡단의 정치, 융합 등의 용어가 더 적절하다)’이 적절한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 표현으로 지난 대선의 핵심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가. 나는 선거 기간 내내 몹시 괴로웠다. 가부장제가 부추기는 여성의 자원이 결과를 좌우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 개혁 이슈가 젠더로 은폐되었다. 김건희 씨의 섹슈얼리티는 성산업과 무관하다. 소송 때마다 검사와의 유착으로 자신을 자원으로 이용한 경우인데, 나는 이와 관련한 글을 열 번쯤 썼다가 여성주의자들에게 ‘왜 김건희 씨를 비판하느냐, 여성혐오’라는 (분노에 찬) 지적을 받고 절망했다.

 

 

약자를 억압하는 페미니즘의 등장

 

누가 우리를 억압하는가와 우리는 누구를 배제하는가는 같은 질문이다. ‘여성’은 상황에 따라 가해자, 피해자, 목격자일수 있다. 페미니즘의 근본 합의-사회정의를 위한 운동-를 부정하는 이들이, 자신을 진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시대다. 이들의 수는 적지 않다. 난민 반대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배제가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여성들, 건강 약자나 낮은 계급 남성을 ‘한남(유충)’이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주류가 되기 위해 기존 사회에서 남성들이 해왔던 각종 부정부패 행위를 서슴치 않는 페미니스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당대 페미니즘은 과거 ‘상록수의 계몽주의적 운동’에서 ‘개인의 이익에 충실한 모든 여성의 일상’으로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여성주의의 열매가 아니다. MB 정권 이후 한국 여성운동이 활발했는가?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신자유주의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한, 절대적 자본주의(absolute capitalism)의 틈새이다. 실업의 만성화는 여성에게도 성역할 대신 ‘개인성’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에게 개인은 언제나 이중적 의미인데 남성, 신분, 성차별로부터 해방이라는 ‘인간화’가 있고, 한편으로는 고립과 단절,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남성의 개인성을 평등의 이름으로 선망하는 것이다. 물론 후자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

 

끝으로 최근 작고한 철학자 장춘익이 그의 학생들에게 들려준 말을 인용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단다.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정희진

❚ 녹색당 당원, 행복생협 조합원, 국방부 민간위원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건강 약자와 장애의 경계에 관심이 많다. 여성주의 커뮤니티를 포함, 한국사회의 정의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